아침에 문득 떠나는 생각 여행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이 함께 잠을 깬다. 눈을 두리번거린다. 생각도 두리번거린다. 나는 잠시 가만히 있는다. 생각은 나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생각은 어디에 있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이제 생각은 너무나 선명하게 머리 속에서 맴돈다. 

생각 손님들을 문전박대하다.

이렇게 생각들과 마주 한지 벌써 2년째. 요즘은 더욱 자주 찾아와서 나를 맴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자주 찾아왔던 것 같다. 한참 때인 30대였을 테니까 건강한 몸과 생각은 비례하는가 보다. 

그때는 애써 찾아온 귀한 생각의 손님들을 박대 하였다. 바쁘다는 핑계였다. 찾아온 생각들은 항상 나에게 많은 보물들을 꺼내 보였다. 그때마다 무관심과 흐릿함이 생각들을 눈앞에서 연기처럼 흩어지게 만들었다. 옛 이야기에나 나오는 절에서 찾아온 시주승을 박대한 모습이다. 결국 보물은 가난하지만 시주 승께 정성껏 시주 한 마음이 착한 주인공에게 돌아가고 만다.      

이제는 내가 보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이제는 내가 보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마음이 가난하지는 않지만 더 이상 어리석지는 말자. 돌이켜 보면 생각들은 나에게  많은 제안들을 했다. 행동하라고 했고 참으라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많은 후회들을 했고 지금도 그 후회를 안고 살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생각이 속삭일 때마다 틀린 선택 들을 하였을까?

이제는 조금 알듯하다.  “자만과 무지” 그동안 겪은 치열한 고통의 대가로 받은 선물이다. 나는 자만과 무지 속에서 성급하게 허둥대다 모든 일을 망치고 말았고 대가는 너무나 상상을 초월한 만큼 컸고 고통스러웠다. 지금껏 이겨내고 있으니 다행이지만 말이다.      

왜 나는 생각의 조각들을 붙잡아야 하는가…

생각은 작은 조각배이다. 얼핏 보면 종이배가 뜬구름 아래에서 강물 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만과 무지로 가득 차 있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흐릿한 눈으로 앞에 보이는 현실적인 이익에만 집착한다.

생각의 조각배는 나에게 속삭이며 강물 위에서 흔들거린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종이배 놀이하듯 떠있다. 결국 작은 조각배를 무시하고 흐르는 강물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다.

비밀은 강물에 있다. 생각을 붙잡으면 조각배는 나를 싣고 강물이 흐르는 곳을 향한다. 내가 어떠한 조각배를 타고 어떤 방향으로 얼마만큼 노를 저었느냐 에 따라 목적지는 달라진다. 처음 종이배처럼 보였던 생각의 조각 배도 차츰 모습을 바꾼다.   

조각배를 타지 않으며 아무 곳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생각들이 손짓하며 속삭였던 삶에서 나는 몇 번이나 조각 배에 올라탔을까? 자만과 무지에서 그만 눈앞의 풀이 무성한 땅에 발을 딛고 말았다. 그곳은 내가 거주할 곳이 아니었다.  

“아~ 이곳은 내가 정착할 곳이 아니구나.” 라고 알았을 땐 나가 타야 하는 조각배는 이미 떠나버리고 눈에 보이지 안았다. 새로운 조각배를 찾아 강물에 뛰어들기에는  너무나 용기가 부족했다.    

나는 어떤 모습의 조각배를 타야 할까.

그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경유한 곳은 각각 다르지만 모두 한 곳의 목적지로 향한다. “행복”이라는 땅이다. 이곳에는 마음의 안식과 편안함이 있다. 노를 젓고 흘러가다 다른 배로 갈아타도 된다. 어차피 한 곳에 도착하니까.    

가만히 보면 조각배들은 모두 이름이 있다. 모양도 각각 다르다. 관심을 조금만 가지면 내가 타야 할 조각배를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다. 자만과 무지 그리고 경솔함으로 눈이 가려 보이지 않을 뿐이다.  

배에는 선장도 없다. 선원도 없다. 오로지 내가 선장이고 선원이다. 내가 탈 배를 고르고 내가 노를 젓고 내가 방향을 조절해야 한다. 하지만 바다처럼 망망대해는 아니다. 물결은 잔잔하고 맑으며 물고기들도 뛰어논다. 대체로 강물의 흐름에 맡기면 알아서 나아간다

왜 생각의 손님들은 아침에 찾아오는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한다. 매일 노력하고 방법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누구나 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럴까…

이제는 행복을 찾는 시간의 단위를 하루로 나누고 싶다. 하루의 활력은 아침에 생긴다.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의 갈림길은 아침에 주어진다. 어린 기억에 시주승이 찾아왔던 시간은 항상 아침이었다. 선택의 시간은 아침이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시간은 아침이다. 그저 느낄 뿐이다. 가능과 불가능을 저울질 하는 시간은 이미 아침을 지나갔다. 버겁다고 느끼는 시간은 아침이 지난 선택의 시간이다.

“아침에 찾아오는 긍정적 사고의 힘” 어쩌면 하루에서 가장 중요하고 삶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른다. 하루의 성패는 아침에 있고 그러한 하루 하루가 모여 일년이 되고 일년이 모여 다시 10년, 10년이 모여 나의 삶이 되지 않는가.

가난한 행복의 기억이 소중한 이유

어렸을 때 가난했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 어쩌면 행복했다는 건 아닐까. 기억에 아른거리지만 찾아온 스님을 할머니는 결코 박대 하지 않았다. 한 보께도 안되는 쌀을 할머니는 스님의 등에 짊어진 시주 자루에 부어주시곤 했다.

가난한 기억은 소중함을 남긴다. 풍족하고 넉넉했다면 한 보께 쌀을 결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축복 받는다. (“Blessed are the poor in heart.”) 의 의미가 이런 뜻일까. 항상 아이들이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주지 못했다.

“선생님.. 마음이 가난하다는 뜻이 무엇이에요?”

“???”

이제 나에게 기회는 만드는 것

가끔 찾아가 담 너머로 쳐다보는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은 겨우 30평이나 될까. 밖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들은 마당 안으로 한 발짝을 넘어 서지 않았다. 그 한 발짝의 공간이 할머니와 스님과의 선택의 경계였다면 조금 섬뜩하다.

나에게 찾아온 수많은 생각의 조각들… 아침은 운명의 기회는 지켜 보기만 하는가 보다. 스님과 할머니의 한 발짝의 공간에서 할머니는 항상 걸어 나가셨다. 아무 말 없이 쌀 자루에 쌀을 붓고 돌아 오셨고 시주 스님도 아무 말 없이 가시곤 했다.